요한 호이징가 <<중세의 가을>>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순수한 봉건 제도와 기사도 만개 시대는 13세기에 이르러 이미 쇠퇴한다. 그 다음은 자치 도시와 영주들의 시기로 제후들의 재력을 지탱해주던 부르조아지의 상업 세력이 국가와 사회의 지배 요인으로 등장한다".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 기사도 정신은 전투에서 더 이상 고려할 것이 되지 못하였다. "전쟁은 14, 15세기에 오면 은밀한 기습과 급습 등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로마네스크한 모험"은 곧바로 패배를 의미했다. "기사단들은 매우 거대한 수효로 창설되었지만, 정치적-군사적인 중요성을 거의 상실하고 단지 일종의 고상한 유희로 잔락하고 만다."

장원이라는 비교적 독립된 경제 체제에 근거한 귀족보다 기독교 세계 전체에 뻗어 있는 조직을 갖춘 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회는 "생활의 모든 소요를 지배하고 모든 것을 고요와 질서로 감싸"며 "누구나 알 수 있는 톤으로 기쁨과 슬픔, 평온과 위험을 알려주"었다. 중세에는 종교적 규범이 곧 사회적 규범이었다. 교회는 온화한 신비주의와 가혹한 마녀사냥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사법 체제였으며 게다가 기사들과 토지를 거의 양분하고 있는 경제 세력이었다. 그들의 타락이 무르익었을 때 기사들이 했던 것처럼 새로 떠오르는 경제 세력의 이상을 위해 기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쇠퇴하는 것이 바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사는 몰락해 가고 사제는 타락해 갔지만 그들이 추구하던, 또는 추구한다고 말했던 이상적인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부르조아들은 기사도적 이상을 모방하기를 갈망했고 노동자들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사회가 '신분들ordres'로 나뉘어져 있다는 개념은 모든 신학적-정치적 사고에 그 골수까지 침투되어 있었다". "제3계급의 개념 속에서 부르조아들과 노동자들은 전혀 분리되지 않았으며 이 같은 현상은 대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 시대의 문명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실제로 그 속에서 살았던 그 착각까지도 진실의 가치를 지님을 알아야 한다". 14, 15세기의 유럽은 좋은 것과 싫은 것, 옳고 그름이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세계이다. 비참함과 자랑스러움, 비천함과 영예로움이 낱낱이 들어났고 경멸과 탐닉, 절망과 희열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쓰라린 삶은 일정한 의미를 갖는 형식으로 덧씌워 졌다. 형식에 미적 감동을 부여하고 신앙의 감정으로 바꾼다. 삶이 신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생각한다. 생각을 이미지로 결정화하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으로 재현하려 한다. 곧 종교적 표상으로 가득차게 된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는 진리로 인식되며 영혼 깊숙히 파고든다. 넘쳐나는 이미지들은 세계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통해 통일성과 윤리적-미학적 가치를 부여받는다. 조락기 중세의 "사람들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사고하고 자신을 표현한다".

그리고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다. 정신은 중세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지만 형식은 인문주의자들이 고대로부터 길어낸 것이었다. 어쩌면 고대로부터 길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크게 보면, 이미지의 시대였던 원시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인 고대로 나아갔고, 마치 예술가가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 다시 이미지의 시대인 중세를 거쳐, 우리가 '르네상스'라 부르는 시기, 즉 문자의 시대로 다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 세기에는 '숫자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중세의 가을>>(2006 문학과지성사) | 알라딘 21,250원
by parxisan | 2007/03/03 20:38 | 비정규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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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음 이기숙 옮김 &lt;&lt;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gt;&gt;(2003/2006 한길사) | 알라딘 22,500원 중세에는 종교가 "생활의 모든 요소를 지배하고 모든 것을 고요와 질서로 감싸"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도 순수한 사람들은 모든 권력은 하느님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 당시 군주들의 세속적인 권력은 종교적인 권력에 의지해야만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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